註一:韓國在1999年至2005年投入1兆5700億韓元(13.4億美元)推動「頭腦韓國21」(Brain Korea 2,簡稱BK21)高等教育改革計畫後,2006年至2013年間再投入2兆3000億韓元(23億美元)進行BK21的第二期計畫;2013年至2019年改名為「BK21+」,擴大到3兆3143億韓元(33億美元)。
2014년 8월, 한 한국 교수가 타이베이에서 강연을 진행했을 때 아래와 같은 실화를 청중들에게 공유했다. 같은해 3월, 북경에서 열린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약칭)기간에 정치국 상무위원 왕치산(王岐山)이 정부보고 중에 한류를 언급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왜 한국 드라마가 중국을 휩쓸 수 있었을까? 무려 13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은 왜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드라마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인가? 그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들을 뒤로하고 「별에서 온 그대」의 성공 원인에 대한 검토를 촉구했다. 이 이야기는 한국대사관과 한국인 사이에 삽시간에 퍼지게 됐다.
「별에서 온 그대」는 중국의 고위 간부의 관심을 끌었고 이에 대해 한국인 모두가 신기해 했다. 사실, 왕치산(王岐山) 이전에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 등은 모두 한국 드라마의 팬이었다. 그들은 한국 방문시 한국 드라마 스타 이영애와 장나라 등과의 만남을 특별히 요청하기도 했다. 이 외에 장쩌민(江澤民)시대의 쩡칭훙(曾慶紅)과 우방궈(吳邦國) 모두 한국 드라마 시청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왕치산의 질의 반년 후인 2014년 10월 24일, 「대장금」의 스타 이영애는 홍콩의 《명보(明報)》와 특별 인터뷰를 진행 했다. (주석 1) 이때 그녀는 왕치산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었다. 인터뷰에서 이영애는 “민주화가 한류의 성세(盛世)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은 1998년부터 민주화가 시작돼 금기를 타파하고, 창조력을 발휘 할 수 있어서 한류가 발전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영애가 답변한 한국의 독재정치 시대에는 영화와 텔레비전의 심의가 엄격했고, 여배우가 민 소매의 옷을 입고 공연 할 수 없게 규제하는 등 자유로운 표현이 억압되었던 시대였다. 한국은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야 영화 검열을 없앴다. 쟁의적인 것과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 대부분 영화로 제작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후 한국은 문화 창의가 잘 발휘 될 수 있게 되었고 현재의 번영에 이를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이영애도 홍콩 영화를 보며 자랐다. 홍콩의 스타 유덕화(劉德華), 장국영(張國榮), 종초홍(鍾楚紅), 주윤발(周潤發)등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영화를 아꼈다. 당시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였고, 홍콩영화는 한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점을 간략하게만 언급해서, 왜 현재 홍콩 사람이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지, 왜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던 홍콩 영화가 몰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은 매우 간단하다.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된 이후,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움츠려 들면서 점차 몰락하게 된 것이다.
틀림 없이 「민주화는 한류를 만들었다.」 이영애는 유일하게 홍콩에서 진실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힌 한국의 연예인이다. 그녀의 지혜와 도덕적 용기가 왕치산 등의 중난하이(中南海)의 한국 드라마 팬 고위 간부들의 부끄러움을 야기 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유롭게 창작하고, 말 할 수 없는 상황 아래서 우수한 영화와 텔레비전 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없는 사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의 민주화는 1998년 김대중 정권에서 시작되었다. 대만의 민주화보다 빠르다. 그러나 한류 문화의 기원은 대만에서 시작 되었다. 1994년 대만에서 유선 텔레비전의 자유화가 시작되면서 (속칭 「제 4 방송국 당장 합법화」) 한류가 발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당시 제 4 방송국은 텔레비전 채널을 말한다. 당시의 태시(台視), 중시(中視), 화시(華視) 등의 오래된 3개의 지상파 채널 이외에 유선의 텔레비전 방송국 대다수는 지방 정치인이 경영하는 위법한 방송이어서 당국의 관리를 받지 않고 있었다. 방송 업무를 주관하는 신문국(新聞局)은 이런 불법 방송을 합법화하고, 전면 개방 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문국의 계획은 철저한 사전준비가 결여되어 있었다. 24시간 방송하는 뉴스 채널은 계속 만들어 졌다. 채널이 증가하는 반면, 대만의 영화, 방송 문화에 대한 정책적인 보호장치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후 한류가 대만에 강력하게 유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과거에 오래된 3개의 지상파 방송국 시대는 대만에서 만든 방송 외에 대다수가 일본 드라마였다. 이 때문에 일본 드라마는 계속해서 비싸졌다. 그러나 텔레비전 자유화 이후, 유선 방송국들은 24시간 방송을 위해서 많은 영상이 필요 하게 됐고, 새로운 방송 영상들을 모으기 시작 했다. 당시 저렴한 가격의 한국 드라마가 이런 형태에서 다량 유입되기 시작 했다. 대만은 한국 드라마가 가장 먼저 수출된 곳이었다. 한국 드라마 업체와 대만 텔레비전 방송국이 계약하게 되면서 한국 드라마는 동남아의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까지 진출 하게 되어 대만 방송 프로그램과 같이 판매되었다.(당시 싱가포르 텔레비전 방송국은 모두 대만 드라마와 대만에서 선택된 영상을 방영 했음). 이후 한국 드라마는 홍콩과 중국까지 판매되기 시작 했다.
한국의 전 주 대만 대사 구양근(具良根)은 대만이 한류의 발원지라고 공개적으로 인정 했다.(2011.8.4). 그에 말에 따르면 2010년 대만에 162편의 한국 영화 및 드라마가 방송 되었다(단, 당해 한국에는 대만 드라마가 한편도 방영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한류(韓流)」라는 단어는 대만에서 먼저 만들어 졌고,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2006년 8월 31일, 「워싱턴 포스트」지가 일본 여성의 한류 열풍에 대한 보도 중 「한류(韓流, Korean Wave)」라는 단어를 사용 했다. 기사는 1990년대 중반 베이징의 한 신문기자가 한류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었다고 잘못 보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는 잘못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와 매체를 통해 계속 인용 되었다.
사실, 1990년대 중반 중국은 한국 드라마를 도입하지 않았었다. 「한류」라는 단어는 대만 신문의 영화 드라마면에서 시작되었다. 1995년 한국 드라마가 대만에 들어온 후 대만의 언론 매체는 「한류 침입」으로 야유하고 폄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만 언론 매체는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 중에 대만의 북부 사람은 습하고 차가운 「한류(寒流)」(한국말: 한파)를 싫어했는데, 같은 발음 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대만이 한류의 발원지와 기폭제 이면서 「한류」의 창조자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류의 발전 모습을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 1대 한류」는 1995 ~ 2005년의 10년간을 가리킨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의 영상 내용의 상품이 주를 이루었고, 소량의 음악 작품이 발전하기 시작 했다. 한류가 퍼져나간 지역은 대만에서부터 일본, 동남아, 중국에 달했다.
「제 2대 한류」는 2006 ~ 2011년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 한류는K-Pop의 공연 그룹과 개별 아이돌 스타 위주로 변화 되었다. K-Pop의 인기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어 섰다. 퍼져나간 지역은 여전히 대만에서부터 홍콩, 동남아, 미주와 유럽의 일부에 달했다. 2012년에서 지금까지는 「제 3대 한류」라고 할 수 있다. 기타의 한국 문화: 한식, 여행, 복식, 화장품, 성형 등이 세계 각지로 전면 확산되기 시작 했다.
제 2대 한류의 핵심인 K-Pop경우, 거의 모든 공연 그룹이 대만을 해외 공연의 시금석으로 찾고 있다. 연예 기획사는 대만 시장에서 흥행하면 전체 중국인의 시장에서도 가능성이 많다고 여기고 있으며, 대만은 한국 공연 그룹이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많은 그룹이 1차적으로 대만에 와서 표를 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인기 거품이 사라져 해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류의 성장에는 대만에서의 한류의 발전과 함께 한국 국내에서의 원인 또한 매우 중요하다. 1997년 금융위기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차관에서 584억 달러를 빌렸고 경제는 IMF의 관리에 들어갔다. 당시 재벌 기업은 전 국민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부실한 재무구조의 개선이 계속 요구 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SOHO(Small Office, Home Office)족 극작가, 프로그래머 등의 문화 예능 콘텐츠 창조 인재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재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
당연히 김대중 취임 후 전면적인 민주화의 원인도 한류의 성장에 큰 공을 세웠다. 이중에는
1.반란과 내란을 통해 집권한 2명의 전 대통령에 중형을 내려 과거사 정리 체제가 만들어 졌고 민주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2.사상, 언론, 창작, 표현 등의 자유를 전면 보장했다.
3.「문화 입국(文化立國)」정책을 제정해서 입법을 통해 문화 산업의 발전을 추진 했다.
4.백제 문화와 신라 문화의 융합으로 한국의 대중문화를 탈바꿈하여 참신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지역 갈등은 여전히 깊다. 한국인들은 이런 요인을 알지만 잘 말하지 않았다.)
5.일본 문화 상품의 수입을 전면 허용해서 영화와 텔레비전 산업이 일본의 다양한 문화적 양분을 얻을 수 있게 했다.
6.각 대학에 「문예창작과」를 설립 했다. (2012년까지 33개의 대학) 대량으로 극본 창작 인재가 배양 되었다. (2012년 모두 2,531명의 극작가가 배양되었고, 이중 87%는 여성이다.)
아울러 우리는 한국이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매우 빠르게 발전한 국가이며, 거의 매 20년 마다 한 가지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국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경제 기적」: 1960년대 초 경제 개방 5개년 계획 발전을 시작해서 1980년대 초에 「한강의 기적」으로 아시아의 4마리 용에 오르게 되었다.
2.「정치 기적」: 1970년대 말 여전히 독재 정권이었으나 1990년 말에 들어서면서 민주화를 실현하였다.
3.「외교 기적」: 1973년 선포된 「북방 외교」로 북쪽의 2개 공산 국가와 관계 개선을 시작해서 1992년 완전히 실현 시켰다.
2000년대 초기 시작된 한류의 발전으로 한국은「문화의 기적」이 창조되어 증명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문화의 기적은 장단점을 반반씩 가지고 있다. 한국의 경제가 거의 「중국에 예속」되어 있어서 중국의 경제가 쇠퇴하면 한중 FTA 성과가 파괴된다. 경제 불경기는 문화 산업 발전에 분명히 영향을 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인재와 인구는 정비례한다. 한국은 인재의 한계로 문화 창의가 고갈 되기 시작되고 있다. 이는 한류가 앞으로 10년 더 지속될 수 있는지 의문을 주는 핵심적 단점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성향 중 하나는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은 교육에 투자함으로써 현재보다 더 높은 곳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이는 「BK21」(브레인 코리아 21: 21세기 한국 인재 배양, 주석 2)의 교육 투자 기획으로 각 영역의 우수한 인재의 지속적 배양을 기대 할 수 있어서 한국 미래의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과 한국 정치 발전의 궤적은 매우 비슷했다. 1990년대 중기 이전 대만의 힘은 한국보다 강했고, 문화 발전 또한 한국보다 다양하고 앞서 있었다. (예를 들어 대만의 새 영화 흐름은 국제 영화제에서 충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민주화와 한국의 경제위기 이후 두 국가의 차이는 점점 커졌다. 한국은 20세기말 대중 문화 발전 수준이 대만을 넘어섰다. 2004년에는 평균 국민 소득 또한 대만을 넘어섰다. 대만 문화와 경제는 모두 한국에 졌다. 대만인은 한국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있다. 이전의 우월감이 좌절되는 감정에서 나타난 피해의식으로 이로 인해 맹목적인 반한(反韓)감정이 유발되었다.
실제 대만인의 「반한」감정은 장기간 국제적 고립으로 야기되어온 「트라 우마 신드롬」의 구체적인 발현이며, 경제와 문화적 실패 이후의 질투심으로 인한 것이다. 이는 대만인의 깊은 자기반성으로 서로 함께 노력하여 수정해갈 필요가 있다. 대만은 왜 오랜 기간 교두보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가치와 위상을 만들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한국도 계속해서 대만을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만 여기고 있다. 대만에 대한 어떠한 보답이나 호의적인 피드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한국의 대중문화 상품을「미남미녀」, 「꽃 미남」, 「근육 남」등과 같이 아름답게 포장하는 방식의 마케팅전략을 취했다. 이를 통해 해외시장을 공략했고, 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착각에 일으키게 됐다. (아, 한국사람 다 이렇게 잘 생겼구나!). 반면, 해외에서의 동성애 용인 경향과는 반대로 한국사회내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극단적으로 배척적이다. 이러한 상황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고, 도덕적이지도 않다. 이처럼 한국의 대중문화는 긍정적인 면만 강조하고 있고, 부정적인 면은 축소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말하자면, 대만은 한국에 패했다. 그러나 대만 사회는 한국에 비해서 「다원화」, 「자유」, 「평등」, 「배외적이지 않고」, 「개인 존중」, 「계급 의식 없고」, 「경제 민주화(재벌의 농단과 통제가 없다)」등이 면에서 월등하다. 이런 「소프트 파워」는 대만의 우수한 장점이다. 대만인은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신을 비하 할 필요도 없다. 장기적으로 말하자면 대만의 다원적 가치는 한국보다 강하고 최종적으로 성공하는 요건이 될 것이다.
대만과 한국 민주화 전환 성공의 경험은 「유교문화권」의 아시아도 100% 서방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제도를 할 수 있다는 증명이며, 이는 우리가 인류문명에 바치는 공헌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석 1 : 명보(明報) 이영애의 특별 인터뷰 http://news.mingpao.com/pns/%E6%9D%8E%E8%8B%B1%E6%84%9B%EF%B9%95%E6%B0%91%E4%B8%BB%E7%B7%A0%E9%9F%93%E6%B5%81%E7%9B%9B%E4%B8%96/web_tc/article/20141024/s00002/1414085975303
주석 2 : 한국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1조 5700억 원(13.4억 달러)을 투입해서 「브레인 코리아 21」을 추진했다. 고등 교육 개혁을 계획 후 2006년부터 2013년 간 2조 3000억 원(23억 달러)을 투입해서 2차 BK21을 기획 진행 했다. 2013년부터 2019년 이름을 바꿔서 「BK21+」로 3조 3143억 원(33억 달러)으로 확대했다.
(“지한 문화 협회” CEO 주립희는 대만 국립 정치 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시사한국어”, “북한연구”, “한국 정치와 민주화”, “한국 과거청산 영화 감상”등 4 과목 강의 하고 있다. 대만의 최고 한국통이다.)